당대 최고의 명필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선생의 생애와 작품세계

– 서예 연구와 보급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여초 김응현

여초 김응현 선생은 1927년 1월 22일 서울 강북구 번동(당시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번리) 오현에서 아버지 번계(樊溪) 김윤동(金潤東)과 어머니 은진 송씨의 5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여초 선생은 병자호란 때 청과의 강화를 거부한 청음(淸陰) 김상헌(1570~1652)의 14대 손이며, 문곡(文) 김수항(1629∼1689)의 12대 손. 곧은 절개의 선비 정신을 이어받은 선생의 가문은 대대로 명필가를 낳은 집안으로도 유명하다.

여초 선생이 태어난 ‘오현병사(梧峴丙舍)’는 선영을 모신 묘역이 있던 곳으로 증조부 김석진(1843~1910)은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거해 낙향해 이곳에 머물다가 1910년 9월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남작작위를 거절하고 자결하였다.

이렇듯 선생은 청백과 절의, 학문 정진의 가풍이 살아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남다른 긍지를 갖고 성장했다.

여초 위의 형제로 경인(褧人) 김문현, 일중(一中) 김충현, 백아(白牙) 김창현도 뛰어난 학문과 서예로 세상에 널리 이름을 알렸다. 특히 여초보다 1년 앞선 2006년에 타계한 일중 김충현(1921~1926)은 여초와 함께 서예계의 양대산맥이라고 불렸다.

여초는 어려서 구한말 비서원승(秘書院丞)을 지내고 학식과 덕망이 높은 대학자로 알려진 조부 김동강(金東江)으로부터 한학과 서법을 배웠다.

어린 시절, 조부 김동강을 모시고 저녁을 먹고 나서 전나무 길을 거닐곤 했는데 그때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글자를 쓰면서 필력(筆力)을 얻었다고 한다.

숭인보통학교 시절 여초는 구양순, 안진경, 유공권 등 당나라 유명한 서예가들의 해서를 배우기 시작했고, 30년대 말에는 조부가 중국의 산동 곡부에서 가져온 한, 위나라의 비첩들을 접했다.

1940년대 본격적으로 서(書)에 대한 열정을 보여 15세 나이에 초기작품인 ‘승경도’를 남겼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고 9월 서울이 수복되었을 때 여초선생은 국회사무처에서 일하게 되었다. 1.4후퇴 때는 부산까지 피난을 가면서 국회사무처 일을 보게 되었고, 이때 선생은 국회보 <주간춘추>의 주간을 맡았다.

선생은 피난 중인 상황에서도 각계 각층으로부터 기증받는 책 3,600여권을 모아 ‘국회도서실’을 개관했다. 나라가 어려울수록 교육의 힘이 더욱 필요하다는 믿음으로 선생은 도서관 개관에 열정을 쏟았다. 이후 1963년 국회도서관법의 제정으로 국회도서관이 정식으로 국가독립기관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선생은 국회도서관 1호 정직원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지난 2002년 국회도서관 개관 50주년을 기념해 국회도서관 1호 정직원인 여초 선생의 서예전을 국회도서관 2층에서 개최하였다.

1956년 12월 25일 우리나라 최초의 서예연구교육기관인 ‘동방연서회’가 창립되었다. 이는 우리나라 서예사에 큰 획을 긋는 일이었다. 당시 김문현과 김충현, 여초 선생 등 세 형제가 모두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여초 선생은 본인이 직접 작성한 ‘동방연서회 발기취지서’에서 서예는 동방문화의 정수로 인간성 도야를 위해 서예교육을 적극 전개할 것을 피력했다.

동방연서회는 1961년부터 매년 5월 전국학생휘호대회를 개최하고 2년에 한번씩 회원전을 개최했다. 동방연서회는 서예를 통한 국제교류에도 큰 역할을 했으며, 여기서 배출된 인사들이 지금 한국서단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

선생은 1969년 이사장을 맡으면서 서예교육을 정립하고 서예문화 확산에 큰 힘을 쏟았다. 동방연서회를 거쳐간 후학들만 9,000여명에 이른다.

여초는 1995년 발간한 『서여기인(書如其人)』의 「현대한국서예론」에서 삼국시대 이래의 금석문과 고려 이후의 묵적에 대한 연구 등을 통해 우리 전통서예를 복원하여 주체성을 확립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우리의 우수한 전통서예가 일제시대를 거치며 친일의 수단으로 변질되면서 급격히 퇴락했다고 보고 일제 이후의 현대서예문화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여초는 서예 진흥에 적극 나서고 전통서예를 복원하면 “일인(日人)의 모방에서 나타나는 민족적 수치도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고 엉터리 서가들도 자연히 도태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초의 가장 뛰어난 공적 중 하나는 우리 민족의 문화적 본질과 닿아있는 광개토대왕비체를 되살려 본격적으로 작품화한 일로 평가받고 있다.

젊은 시절 광개토대왕 비문을 직접 탁본해 서체를 깊이 연구한 여초는 이 서체는 중국에 없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가 살아있는 독창적인 미감의 서체로 높게 평가하였다.

아울러 1천년 후대에 만들어진 훈민정음 반포본 서체 필법의 연원을 광개토대왕비문의 서체에서 찾았다.

여초는 이에 더 나아가 독창적으로 고쳐 만든 ‘광개토왕비체(광개토대왕비체,호태왕비체라고도 함)’로 다수의 작품을 쓰기도 했다.

여초의 전통서예 복원의 노력은 2003년 인제 구룡동천에서 완성한 대작 ‘광개토대왕 비문’으로 결실을 맺었다. 매일 목욕재계를 하고 붓을 잡을 만큼 정성을 들이고 정신을 모아 쓴 작품은 너비 6m, 높이 5.34m에 1천802자를 담은 대작이다. 여초는 말년의 이 대작을 통해 대륙을 달렸던 고구려인의 기상을 재연하고자 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76세이며, 지병을 앓고 있어 몸도 편치 않은 상태였다.

여초는 한국서단을 바로잡기 위해 신랄한 비판을 마다하지 않았다. 기사반정(棄邪反正)의 기치를 내걸고 잘못을 과감하고 공개적으로 비판하였다.

김응현은 한국서단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근본 원인을 공모전에서 찾았다. 국전은 1회부터 몇 사람의 손에 농간되어 되물림되면서 서법의 어떤 수준도 없이 사전에 미리 지목된 출품자가 상을 타는 악순환이 계속 되어 혼탁해졌다고 언론 인터뷰를 통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여초의 기사반정 정신에 입각한 날선 비판은 1968년 제 17회 국전 서예부문 대통령상을 수상한 모씨의 <국문전서 애국시>로 꽂혔다. 당시 수상작에 대해 한 심사위원은 상이 돌려먹기식으로 배정되었다고 폭로했고 여초는 “이 졸렬한 먹 장난은 글씨도 아니다”라며 서법의 원리를 들어 수상작을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비판했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 서예사의 일대 사건으로 남을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여초는 서예가 기교로 빠지는 것을 심히 경계했다. 여초는 인간성이 결여될수록 몸치장에 신경을 쓰는 것처럼 서예에서 ‘도안적인 기교’는 무가치하며 점이나 선 하나에도 ‘인간미’가 존재치 않으면 서예 자격을 상실한다고 주장했다.

1999년 5월 여초 선생은 교통사고로 오른손 손목이 골절되어 붓을 들 수 없게 되자 평생 쓰지 않던 왼손(左手)으로 붓을 잡고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서예는 단순히 익숙한 손 감각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쓰는 것임으로 보여주기라도 하듯, 선생은 오른손이 다 낫기까지 3개월 동안 왼손으로 쓴 80여점의 좌수서(左手書)를 남겼다. 힘이 덜 잡힌 왼손으로 먹을 찍으니 부조화에서 진동이 심했지만, 거친 맛이 오히려 천진스런 순수함을 보여주었다.
2000년 6월에는 이 좌수서 작품을 모아 전시회를 개최해 많은 이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법고창신은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으로 옛 것에 토대를 두되 그것을 변화시킬 줄 알고 새 것을 만들어 가되 근본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여초 선생은 서예론에서 법고창신을 강조하였다. 이는 지금도 한국 서예계에서 금과옥조로 신봉하는 이론이다. 서예를 익히는 방법론에서 특정인의 글씨를 따라 쓰다 보면 몸에 익어 버리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고대의 법첩을 익히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고대의 글자는 따라 익히되 현대 서예가의 글자를 그대로 모방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배울 때는 옛 법을 익히되 익히고 나서는 자신의 창의력을 발휘하라는 것이 법고창신의 뜻이다.

“글씨를 쓸 때는 마음이 구속을 받아서는 안되고 호탕하고 자유스러워야 하며 안정이 되어있어야 한다”

“편협과 독선을 배격한다. 나를 닮으라는 권위 아닌 권위를 적으로 삼는다. 또 그릇된 섹트를 타도하기 위하여 궐기한다.”

“인격에 의하여 그 서법예술의 성격을 형성한다는 것에 주목해야한다. 그 까닭은 인격 그 자체가 서법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