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초 김응현은 2006년 광화문 현판 교체론이 대두될 당시 현역 서예가 중 1순위에 오를 정도로 명실상부 근현대 한국서단의 최고 대가(大家)로 인정받았다. ‘추사 이후 여초’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친형인 일중 김충현과 함께 근현대 서예사의 4대가로 주목받았다.

한문서예 오체인 전서·예서·해서·행서·초서를 두루 잘 썼으며, 한글서예와 전각도 뛰어났다. 그의 글씨는 원숙미와 독창성이 돋보이며 서체가 활달하다는 평가와 함께 명성이 중국, 일본, 대만 등 국외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선생은 지금의 서울 성북구 번동에서 태어나 휘문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1950년부터 10년간 국회보 주간를 지냈으며 국회도서관 1호 정직원이었다.

일제시대를 거치며 단절되고 왜곡된 우리의 전통서법을 다시 잇기 위한 노력으로, 1956년 국내 최초의 서예연구교육기관인 ‘동방연서회’ 창립을 주도하고 1969년부터 이사장을 맡아 9,000명의 후학을 양성하는 등 서법교육에도 평생을 바쳤다. 1996년 민족문화의 계승과 창달을 위한 전문교육기관을 설립하고자 지인들과 함께 학교법인 동방학원을 설립하였다. 10년 동안의 노력으로 2005년 ‘동방대학원대학교’가 개교하여 운영되고 있다.

서예잡지 『서통(書通)』과 『서법예술』을 창간하여 한국서예사의 체계를 세우고 서예 보급에 큰 역할을 했으며, 한국전각협회 회장과 사단법인 국제서법연합 한국본부 이사장을 지내며 중국·일본·홍콩 등과 국제교류전을 통해 한국 서예를 해외에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990년 10월 한국 서예가로서는 최초로 중국혁명박물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해 우리나라 서예의 우수함을 널리 알렸다.

여초는 1996년부터 인제군 북면 한계리에 ‘구룡동천(九龍洞天)’이라는 집을 짓고 자연과 벗삼아 만년의 자유로운 작품세계를 펼쳤다. 작고하기 10여년 전부터 당뇨병을 시작으로 중풍과 파킨슨병 등 합병증이 겹쳐 투병해야 했지만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결코 붓을 내려놓지 않았다.

1999년에는 교통사고로 오른 손목에 골절상을 입게 되자 3개월 동안 왼손으로 붓을 들고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 다음해에 ‘좌수전(左手展)’을 개최하기도 했다.

2003년에는 가로 6m, 세로 5.3m에 이르는 필생의 역작 광개토대왕비문을 완성했다. 건강이 크게 악화된 2006년 초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2006년 정부가 광화문 현판 교체를 검토하면서 글씨를 선생에게 의뢰하려 했으나 건강 악화로 성사되지 못했다. 2007년 2월 1일 당뇨병 합병증으로 1개월 간 입원 끝에 타계하였다.

여초는 서법의 기초부터 숙달과정을 배울 수 있는 서예교본으로 대표적인 문헌과 금석문 등에서 서체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것들만 골라서 직접 글씨를 쓴 30권 분량의 『동방서범(東方書範)』을 근 10년에 걸쳐 완성했다. 이밖에 『동방서예강좌』, 『서여기인(書如其人)』 등을 저술했다.

여초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광개토대왕비문과 경복궁 ‘강령전’ 현판, 경북 김천의 ‘영남제일문’ 현판과 ‘직지사’ 현판, 공초 ‘오상순 시비’, 하동의 ‘칠불사’ 현판, 낙산사의 ‘보타전’ 현판이 있다.

중앙일보 2007년 2월 2일

[삶과추억] 추사 맥 이은 이 시대 명필
1일 별세한 서예가 여초 김응현 선생

한국 서예계의 원로인 여초(如初) 김응현(사진) 선생이 1일 오후 7시 별세했다. 80세. 지난해 11월 친형 일중(一中) 김충현 선생이 85세로 타계한 지 70여일 만이다. 형제는 추사 김정희의 맥을 이은 소전 손재형(1903~81), 검여 유희강(1911~76) 이후 우리 서예계의 양대 산맥으로 불려왔다. 고인은 당뇨와 파킨슨 병 합병증으로 10여 년 전부터 투병해왔다. 1996년부터 설악산 백담사 인근에 ‘구룡동천(九龍洞天)’이라는 통나무 집을 짓고 지내오다 한 달 전 당뇨 합병증이 악화해 서울대 병원에 입원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붓을 잡은 여초는 해서.행서.초서.예서.전서의 모든 서체에 능하고 마음과 손의 조화를 이룬 것으로 유명하다. 문인정신의 정수로 지칭되는 그의 글씨는 원숙미와 독창성이 돋보이며 활달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필치가 중국과 일본에까지 널리 알려졌으며, 서예계 일각에서는 ‘추사 이후 여초’라는 찬사도 있었다. 1956년에는 동방연서회 설립회원으로 참여했고 69년부터 이사장을 맡아 수천명의 제자들을 길렀다. 한국전각학회 회장과 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부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저서로 ‘동방서예강좌’ ‘동방서범(東方書範)’ ‘서여기인’을 냈다. 특히 ‘동방서범’은 10권 분량의 방대한 교본이다. 동양 서법사의 대표적인 문헌과 금석문 중에서 각 서체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들만 골라 직접 글씨를 썼다.

99년 교통사고로 오른 손목이 부러지자 설악산에서 지내면서 3개월간 연습해 2000, 2001년 왼손 글씨 전시회를 한국과 중국에서 열었다. 회복 후에는 다시 오른손으로 글씨를 써 쌍수(雙手) 서예가로도 이름을 알렸다.

고인은 건강이 크게 악화된 지난해 연초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정부가 광화문 현판 교체를 검토하면서 글씨를 의뢰하려 했고, 고인도 의지를 밝혔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작품으로는 경북 김천의 영남제일문과 직지사 현판, 하동 칠불사의 현판이 있다. 2003년엔 광개토대왕 비문 1802자를 담은 높이 5.3m, 너비 6m의 대작도 공개했다. <이하 생략>

조현욱 기자

경향신문 – 사람과 사람 2007년 2월 2일

‘神品’의 서예대가 여초 김응현 별세

한국 근현대 서예사의 4대가로 꼽히는 서예계의 원로 여초(如初) 김응현(金應顯)씨가 숙환으로 1일 저녁 7시 별세했다. 향년 80세.

전서와 예서·행서·해서·초서 등 오서에 두루 능통하고 특히 육조해서가 뛰어났던 고인은 창문여고 설립자인 김윤동씨의 3남으로 지난해 11월 타계한 서예가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선생을 형으로, 백아(白牙) 김창현(金彰顯)씨를 동생으로 두었다.

고인은 1927년생으로 휘문고와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해 신학문에도 밝은 지식인이었지만 한학자 집안에서 자란 때문에 어린시절부터 붓을 놓지 않았으며 서예와 한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50년부터 10년 가까이 국회보 주간을 맡고 국회도서관에서 일했다.

그 사이 숙명여대와 홍익대, 성균관대 등에서 문학과 서예, 한학을 가르쳤다. 56년에는 이론과 실기를 겸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서예연구교육기관인 동방연서회를 설립해 수천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지금은 폐간됐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서법 연구잡지인 ‘서통(書通)’을 창간해 삼국시대 이후 조선에 이르기까지 옛 글씨를 조명하는 시리즈 등을 기획, 한국서예사의 체계를 세우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밖에 국제서법예술연합을 만들어 일본, 중국, 홍콩 등 아시아의 여러 국가들과 국제교류전을 활성화시켜 한국서예를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도 기여했다.

여초는 지난해 광화문 현판 교체론이 대두될 당시 현역 서예가 중 1순위로 오를 정도로 신품(神品)의 경지에 오른 서예가였다. 예술의전당 서예관의 이동국 큐레이터는 “여초는 소전 손재형(1903~81), 검여 유희강(1911~76), 일중 김충현 (1921~2006) 선생과 함께 근현대 서예사의 4대가로 꼽히는 인물”이라며 “소전은 전서체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서법을 열었고 일중은 정통서법에 강했다. 여초의 경우는 이 두 분이 하지 못했던 금석기가 두드러지는 육조해서를 토대로 독자적인 서법을 만들어냈다. 한글과 한문을 두루 잘 썼고 전각에도 뛰어난 독보적인 존재였다”고 평가했다. 이씨는 또 “서예 하면 늘 중국의 것이 최고인 것으로 아는 상황에서 한국적 서예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천착하고 실천했던 인물”이라고 말했다.

경북 김천시 황악로에 설치된 ‘영남제일문’ 현판과 김천 직지사의 현판, 공초 오상순 시비 등이 그의 작품이다. 고인은 주요 서책과 비문에 근거해 각종 글씨체를 재현한 ‘동방서범’이라는 30권짜리 서예교본을 10여년에 걸쳐 냈고 ‘동방서예강좌’ ‘서여기인’ 등의 책을 통해 서법을 연구해왔다.

96년부터 설악산 백담사 부근에 ‘구룡동천(九龍洞天)’이라는 집을 짓고 자연과 벗삼아 지내며 글씨를 수련했다. 그러나 10여년전 당뇨병을 시작으로 중풍과 파킨슨병 등 합병증이 겹쳐 투병해왔으며 99년에는 교통사고로 오른 손목에 골절상을 입기도 했다. 당시 몇달간 수련 끝에 왼손으로도 글씨를 쓸 수 있게 돼 왼손으로 쓴 글씨들을 모아 2000년과 2001년 한국 및 중국에서 ‘좌수전(左手展)’을 열기도 했다. 회복 후에는 다시 오른손으로 글씨를 써 쌍수(雙手) 서예가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2003년에는 가로 6m, 세로 5.3m에 이르는 필생의 역작 광개토대왕비문을 완성했지만 이후 건강이 악화돼 붓을 들지 못했다. 한 달 전 당뇨 합병증이 악화해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이하 생략>

윤민용 기자

“고졸하나 우둔하지 않고 활달하나 법도가 있고 염미하나 속되지 않고 웅혼하나 패도하지 않아 강과 유가 서로 돕고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룬다.”

– 종명선 중국 서안교대 교수의 여초 서법에 대한 평

“여초의 세계는 문자향과 서권기가 넘치는 가운데 원숙과 창로의 경지에 들어 혼연천성하고 묘합자연하여 자신만의 서법언어를 향유하고 있다”

“추사(秋史) 이후 여초(如初)”

– 명지대 진태하교수